홈 > 경남 교육사 > 경남교육 인물사
경남교육 인물사
  • 강 익 (姜翼 : 1523~1567)
  •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서 호는 개암(介庵), 자는 중보(仲輔)이다. 함양군 수동면에서 태어났다. 유학의 대학자로서 지리산에 은거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한 남명 조식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때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동국18현이며 조선 5현이신 정여창 선생의 심오한 사상을 전수받을 만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1566년(명종21) 홍문관 전한의 벼슬을 지내면서 정여창 선생의 누명을 벗기기 위하여 유생 33명을 설득하여 상소를 올린바 있으며 후학들의 양성을 서둘러 많은 선비들을 배출 시켰다.

    벼슬에 뜻이 없어 낙향하여 독서로 여생을 보내면서 향토의 유생들과 당시의 함양군수를 설득하여 정여창 선생을 기리는 남계서원을 건립하기로 하고 착수하였으나 재정 부족으로 공기가 연장되어 3명의 군수를 거치면서 어려움을 극복, 10년만에 완공하여 선비 고장의 긍지를 높이고 학풍을 잇게 하여 군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1689년(숙종15년)에 남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개암집>이 있다.
  • 권영조 (權寧祚 : 1883∼?)
  • 진동면 고현리에서 태어난 그는 1912년 향리에서 사립 경행학교를 설립하고 인근의 청소년을 모집하여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의거소식을 듣고 진전면 일암리 변상태(卞相泰)의 집에서 권영태, 권태용 등과 같이 거사를 계획하고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거사일을 3월 28일 고현장날로 정하고 권오규, 권태준 등 여러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리에 진전면 뒷산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만들고 격문은 권태준이 맡아 '일아동포(日我同胞) 유진무퇴(有進無退)'라 하여 주변마을에 연락하며 군중동원에 힘썼다.

    3월 28일 고현장터에서 권영대의 만세선창으로 군중이 6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시위를 시작하여 진동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진출하였다.
    그 후 시위 주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재판에 회부되어 부산지법 마산지원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 김기호 (金琪鎬 : 1912~1978)
  • 김기호는 본관이 김해, 호는 무원으로 시인, 서예가이며 교육자이다. 1912년 9월 10일 경남 거제 하청면 실전리 45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33년 동래공업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경성사범 연습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고향에 하청중학교를 창설하였고, 1953년 하청고등학교를 개교하여 교장에 역임하였다.
    정부에서 여러 차례 도시의 좋은 학교를 맡아 달라는 청을 사양하고 농어촌 학생을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구국애민 정신을 높이 받들어 충무공의 우국 충정의 얼과 애국애족 정신을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그의 생애는 한평생 외곬 인생으로 학교와 학생 곁에서 후세 교육에 몸 바쳤다.
  • 김말복 (金末福 : 1909.6.25~1985.5.27)
  • 1909년 6월 25일 양산 하북에서 태어났다.

    조국광복에 헌신코자 신학문을 배우며 항일민족의식을 키워 어려서 불교에 귀의한 그는 통도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3.1독립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서 독립선언을 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사' 및 '님의 침묵' 등의 저서를 읽고 조국광복에 헌신할 결심을 하였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전수학교를 거쳐 1936년 동경에 있는 불교계 구택대학에서 수학하면서 항일민족의식을 굳혔다.

    1939년 3월 졸업과 동시 귀국한 그는 양산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국체(國體) 및 식민지 통치와 왜곡된 역사를 부정하고 학생들에게 한국의 민족사ㆍ언어ㆍ문학을 교육하여 항일독립 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강요의 부??판하며 애국적 인재를 양성 하는데 전력하다 피체(被逮)되어, 1942년 5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을 맞이하자 통도사 주지로 임명 받아 수도승의 훈육과 종무(宗務)활동에 수년간 참여하였고, 교육보국의 이념을 가지고 다시 1964년 3월 보광중학교(통도중학교 후신) 교장으로 취임하여 정년 퇴임시까지 10여 년간 후진양성에 이바지하였다.
  • 김수돈 (金洙敦 : 1916∼1966)
  • 화인(花人) 김수돈은 마산시 오동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 나고야 중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1939년『문단』지에 시「소연가(召燕歌)」,「고향(故鄕)」「동면(冬眠)」「낙타(駱駝)」로 정지용(鄭芝溶)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했다.

    다시 일본에 건너가 39년 4월에 일본대학 고사부(高師部) 공민과(公民科)에 입학하여 42년에 중퇴한 화인은 경성인문중학교를 비롯하여 경남중학교 동래여자중학교 등에서 5년에 걸쳐 교편생활을 하였다. 51년부터는 줄곧 마산제일여고에 근무하였고, 60년에는 3년간 해인대학 강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951년 문총 중앙위원이 되었고 다년간 마산 문협지부장과 연극단체를 이끌어 왔다.
    1963년도 제2회 경남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하였다.

    1973년에 그의 대표작인「우수(憂愁)의 황제(皇帝)」가 산호공원에 시비로 건립되었다.
  • 김윤경(1894~1969)
  • 김윤경은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11년 주시경을 만나 처음으로 한글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11년 4월에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원으로 부임해 1917년까지 재직했다.
    이때에 그의 첫 논문이라 할 수 있는 <조선어학연구의 기초>라는 글을 썼다.
    이후 1921년 12월 3일에는 ‘조선어학회’의 전신이랄 수 있는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회원이 되어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다가, 1942년 10월 1일에 ‘조선어학회 박해사건’으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 김종직 (金宗直 : 1431~1492)
  • 김종직은 그의 고향(밀양)에서 당대의 종장으로서 지방 문풍과 문운을 진작시킨데 헌신하였다.
    그는 고향의 풍습을 바로 잡고 젊은 자제들을 모아 향학열을 드높이는데 노력하였다.

    특히 향교 교육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향교의 질적 향상에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였다.
    만년에 고을의 한 노인의 입장에서 밀양 명륜당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보낸 당부 가운데 그가 평소 지녔던 향교에의 기대를 펼치고 있다.
    향교에서 강학을 밝게하여, 사제충신의 가르침을 사람마다 잘 따르고 익히면, 학교로부터 골목에 이르기까지 풍습과 교화가 미쳐져서 사회질서가 자연히 바로잡힐 것이니, 치화(治化)는 향교에 그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후일의 산림학파의 개조로서 학맥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향교교육의 중요성과 역사성, 나아가서는 향리를 중심으로 한 역사 의식 위에 교화의 막중함을 일깨웠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며 밀양이 당시 영남일대의 새로운 학풍의 온상이 되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명도석 (明道奭 : 1881∼1954)
  • 허당(虛堂) 명도석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교육자이다.

    1881년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어시장에서 판매업에 종사하면서 일찍부터 착실한 기반을 닦았다.

    그는 교육만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굳게 믿고 유력 인사인 옥기환(玉麒煥),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1907년 7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야학교를 설립하고 강단에 서기도 하였다.
    1919년 이형재(李瀅宰) 등과 함께 3월 21일을 기하여 추산 활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27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에 적극 참여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다 검거되어 평양 미결수 감방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기?당은 양조장 경영에서 운송업으로 전업하여 수송 차량을 통해 만주 등지에 활약하는 독립운동가와 단체에 은밀히 자금을 조달하는 데 남다른 기여를 했다.
    특히 자력갱생의 산실이라고 할 원동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평소친분이 두터웠던 부산거주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를 통해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제 패망전인 1994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비밀결사체인 조선건국동맹이 결성되자 경남조직책을 맡았고, 해방을 맞은 그 해 8월 17일 ‘건준’ 마산시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허당은 "늘 뜻을 행하되 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웠으되 명예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건 준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입신영달에는 안중에 두지 않고 자택에서 은거하면서 54년 6월 4일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감했다.
    뿐만 아니라 1940년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할 때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굳건히 지켰다.
  • 변계량 (卞季良 : 1369~1430)
  • 변계량은 조선 태종 때의 문신(文臣)으로서 공민왕 15년(1369년) 밀양군에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한 뒤에는 문학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대제학의 관직이 중시되었다.
    그는 대제학의 직책에 20여년 동안 재직하면서 국가의 중요한 시책을 공포하는 교지의 작성이나, 중국과의 중요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함께 담당하였다.
    또한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개수에 참여했고, 문장과 시에도 뛰어나 문묘·기자묘의 비와 ‘낙천정기’,‘헌릉지문’등을 지었다.

    한편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을 관장하여 공정하고 엄격하게 시험을 시행함으로써, 고려 말 이래로 여러 병폐가 있었던 과거의 풍속을 바르게 바꾸었다.
  • 성여신 (成汝信 : 1546~1632)
  • 성여신은 명종 1년(1546년)에 나서 인조 10년(1632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조 학자로 자는 공실, 호는 부사 또는 부사야로이다.
    그는 남명 조식선생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문명(文明)을 떨쳤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부사는 고향으로 돌아와 이때부터 학문에 정진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황폐해진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향약을 실시하고, 예를 복구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게 되었다.
    64세 때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71세 때 봄에는 금산에서 여씨향약을 본받아 이를 약간 보완하여 금산동약을 시행하였으며 ‘소학’과 ‘대학’의 규범을 본받아 양몽(養蒙), 지학(志學)의 두 서재를 세워서 고을의 후생들을 가르쳤다.
  • 손영식 (孫永植 : 1906년~1945)
  • 일제시대의 신교육 선구자이다. 1906년에 밀양읍 교동에서 대지주 손영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밀양 국민학교와 동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일을 도우며 마을 뒷산에 야학원(夜學院)을 세워 중학 과정까지 가르치는 한편 한글과 우리의 역사도 일깨워 주었다.
    한편으로는 토지 경작자들에게 영농방법을 가르쳐 주고 소작료도 낮추어 받았으며 흉년이 들면 소작료를 받지 않기도 했다.

    그는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짓고 야학교 교사로서 10년을 재직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밀성 초등학교(당시는 제2보통학교)가 인가를 받게 되자 논 5,800평을 학교 부지로 희사하여 학교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5년 3월에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안확 (安廓 : 1886~1946)
  • 안확은 1886년(고종 23) 서울에서 태어났다.

    문학·어학·음악·미술·정치·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우리나라 근대 학문의 기초를 마련한 이로 평가되는 안확이 창신학교에 처음 부임한 때는 1910년이다.
    2년 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1916년 다시 창신학교로 돌아와 역사와 한글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1917년에는 그의 첫 저술서인 "조선문법"을 펴냈다.
    이때 창신학교에는 주시경의 제자로서 일찍이 한글운동에 힘을 쏟고 있던 김윤경이 함께 일하고 있었고, 역시 주시경의 제자로서 평생을 한글교육과 보급에 힘을 쏟은 이윤재가 가까이 의신여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안확은 비록 우리말에 대한 주시경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기도 했지만, 나라 잃은 시기에 ‘우리말이 곧 우리얼’이라는 언어민족주의적 교육관에 있어서는 김윤경이나 이윤재와 다르지 않았다.

    마산에서의 안확은 단순한 민족교육가로서의 면모만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916년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을 맡아 일하면서, 일제에 대한 적극적 투쟁을 실천해 보인 광복투사이기도 했다.
  • 안희제 (安熙濟 : 1885~1943)
  • 백산 안희제는 고종 22년(1885년) 8월 4일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설뫼마을에서 태어났다.
    1908년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온 후 어른들과 상의하여 문중의 재실 건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였고, 의령에 의신학교, 구포에 구명학교, 대구에 교남학교를 설립, 신학문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어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만주 경무청에 수감된 동안 혹독한 고문으로 병세가 악화되자 명분상의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43년 8월 59세로 타계하였다.
  • 어효첨 (魚孝瞻 : 1405~1475)
  • 어효첨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함종, 자는 만종, 호는 구천이며, 시효는 문효이다.

    142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예문관 검열에 선임되고, 이어 기사관으로서 ‘태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문종이 동궁일 때 선발되어 좌정자·좌우사경문학을 거쳐 1443년 집현전 교리가 되어 서연관으로 문명을 날렸다.
    1446년 집현전 응교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하였다.
    1449년 직집현전을 역임하고, 예법·공법·사창법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고려사’의 체재를 기·전·표·지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세자(문종)에게 예기를 강의하기 위하여 예기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중요한 학설을 발췌하여 주석을 단 '예기일초'를 지었다.
  • 오건 (吳健 : 1521 ~1574)
  • 덕계 오건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조선 유학의 최고봉인 남명과 퇴계의 수제자로 지행일치의 소신을 실천한 도학 정치가이자 이름 높은 유학자이다.

    그는 현 산청읍 지리 덕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31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남명을 찾아가 학문을 닦았다.
    38세에 대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교수가 되어 경북 성주에 가서 당시 목사인 황준량과 녹봉 정사를 짓고 학생을 모아 가르쳤다.
    이 무렵 도산으로 퇴계를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44세에 성균관 학우가 되어 서울로 돌아가,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 이조전랑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선조 4년(1571년)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52세때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연을 벗삼아 원근의 사우와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옥기환 (玉麒煥 : 1875 ~1953)
  • 남전(藍幽) 옥기환은 1875년 마산시 남성동에서 태어났다. 35세가 되던 해인 1910년, 신교육을 통한 자주성을 확보해야 된다는 신념으로 지방 유지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무상으로 신식 교육을 받도록 주선하는 일과 함께 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일로매진하였다.

    야학교 하나만으로 일반인들의 교육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마산지역의 특수성을 살릴 실업학교설립이 시급함을 절감하고서 기성회(期成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1921년 12월 28일 3년제(을종)의 마산공립상업학교 설립 인가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 후에 5년제(갑종) 상업학교로 승격시키는데 지대한 노력을 다했다.
    이뿐만 아니라 중앙중학교 교사신축에 건축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금 천오백 원(圓)을 기탁한 일을 비롯해 암울했던 일제시대에도 육영의 꿈을 펼치고자 성호국민학교 학부형회장을 30여년이나 역임했는가 하면 일본인 학생이 3분의 2가 넘는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에 한국인을 대표하여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 이수인 (李秀仁 : 1939~ )
  • 이수인은「둥글게 둥글게」·「앞으로 앞으로」·「방울꽃」등의 동요를 비롯하여 「고향의 노래」·「석굴암」·「별」등의 가곡을 지은 작곡가이다.

    그는 마산 출신으로 고교시절에는 소설가 이제하 등과 함께 '청운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문학과 인생을 토론하기도 했다.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에 진학하여 작곡가 김동진의 수제자로서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았다. 한 때 그는 마산 제일여고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30여 년이 넘도록 'KBS 어린이 합창단'을 이끌어 오고 있다. 또한 그는 동요보급 모임인 '파랑새'를 통해 동요 대중화에 힘썼다.
    대표적 작품집으로 『가곡집』(1965), 『합창가곡집』(1973), 『달·포도·잎사귀』(1973) 등이 있다.

    앞으로 앞으로」는 1969년 7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계기로 꿈의 실현, 곧 어린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만든 노랫말에 곡을 붙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앞으로 앞으로' 걸어나가는 진취적인 기상을 심어주고 있다.
  • 이극로 (李克魯 : 1893~1978)
  • 이극로는 1893년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 여섯에 집을 나와 창신학교에서 2년 동안 신학문을 배웠다. 창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지였던 중국 동제대학에서 그는 한글학자 김두봉을 만나 함께 한글 자모체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1923년 10월, 독일 유학 시절에는 베를린 대학에 마련된 ‘조선어과’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김두봉이 만든 한글 자모 분할본 활자판을 이용해 <허생전>을 외국에서 최초로 인쇄, 배포하여 조선어를 가르쳤다.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던 해(1927)에는 벨기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부터 영국과 프랑스에서 정치·경제·음성학 등을 배워 1929년 귀국했고, 곧이어 ‘조선어연구회’회원으로 일하다가 1929년에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본격적인 한글사전편찬 사업에 힘을 쏟게 된다.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어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6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뒤인 1946년엔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초등학교 의무교육 제도를 정부에 건의하여 통과시켰고, 다음해인 1947년엔 민주독립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 건민회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가 평양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김두봉과 함께 우리말 연구에 계속 힘쓰다가 1978년 9월 13일에 숨을 거두었다.
  • 이승규 (李承奎 : 1860 ∼ 1922)
  • 남하(南荷) 이승규는 철종 11년(1860년)에 태어났다.
    1906년 5월 17일 성호리에 창신학교(昌信學校)의 전신인 독서숙(讀書塾)을 설립하고, 표면상 기독교 선교사를 내세워 학교를 운영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한옥을 개조한 독서숙은 먼저 청소년들에게 책을 읽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로 10여명의 아동들을 모아놓고 시작한 것이다.

    그는 영국 부인으로부터의 운영자금으로 매월 성금을 받아 독서숙을 키웠다. 신학을 배우려는 열의가 충만한 청소년들이 날로 증가했는데 성호리는 물론 회성, 웅남, 구산 등지에서도 몰려들었다.
    1908년 9월 15일 손안로 선교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부교장은 이승규가 맡았다.

    그해 10월 서점경영인 김지관(金志觀)과 함께 모금운동을 전개한 결과 이백십 원을 모아 학 이수학(李壽鶴) 외 7인이 동지를 규합하여 모금을 벌인 결과 총 870원의 금액을 마련한 그해 11월에 마산 최초의 양식건물인 상남동 새 교사를 건립하였다.
    또한 호주 선교본부의 승낙을 얻어 1913년 4월 5일에는 의신여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창신학교 유지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특히 민족자주정신 고취를 위해 1914년 5월 7일 창신학교 개교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추산정에서 마산이 생긴 이래 최초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22년 3월 29일 신교육의 개척자요 기독교 신앙을 이곳에 뿌리내리게 한 기독 실업인이었던 그는 1922년 세상을 떠났다.
  • 이원수 (李元壽 : 1911 ∼ 1981)
  • 이원수는 양산 출신으로 1911년에 태어나 1981년에 사망한 아동문학가이다.
    1926년 동요 ‘고향의 봄’이 방정환에 의하여 ‘어린이’에 뽑힘으로서 문단에 나와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내재율 중심의 현실 참여적 동시를 개척하여 ‘헌 모자’, ‘보리방아 찧으며’, ‘교문 밖에서’, ‘이삿길’ 등 자유 동시를 확립한 대표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또한, 장편동화 및 아동소설을 확립하는데 선구적 업적을 남겼으며, 작품 활동 외에도 비평 활동을 하면서 비평 부재의 아동문학계에 아동문학이론을 확립하였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동상은 세속적 의미의 불행한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전기의 동요·동시로부터 숲속나라, 라일락 언덕, 신의 합창 등에 나오는 불행한 아이들이 현실적 불행을 인내와 끈기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이윤재 (李允宰 : 1888~1942)
  • 이윤재는 고종 25년(1888년)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다.

    1913년부터 마산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에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면서 젊은 후배들에게 국어와 나라사랑의 혼을 일깨우는데 전념하였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학교에서 재직 중 3·1운동에 가담하여 3년간 복역하였다.

    1924년 조국에 돌아와서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 이듬해에 서울에서 1937년까지 우리말 교사로서 후진 양성에 전력하였다.
    국어학자들과 한글맞춤법을 제정하는 한편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피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 이일래 (李一來 : 1903~1979)
  •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동요 「산토끼」의 작사·작곡가는 마산 출신의 이일래이다.
    그는 1903년 5월 10일 마산시 성호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 서울중동중학을 거쳐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한 뒤 3학년 때 중퇴, 마산으로 낙향해 창신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산토끼」는 1928년 창녕 이방면 이방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 지어진 작품이다.
    어린이들에게 민족적 얼을 고취시키기 위해 작사·작곡했는데 항일 사상과 동심이 잘 내포된 동요곡으로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고향인 마산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많은 사회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 경상북도 초대 상공국장을 지냈으며 서울과 양주군 등지에서 살다가 1979년 7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창녕 이방초등학교에 「산토끼」노래비가 남아있다.
  • 이정 (李楨 : 1512~1571)
  • 이정은 호가 구암. 조선중기 유학자요 문신이며 교육자이다.

    1555년 왜구가 호남성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고, 1559년 우부승지 ·형조참의 ·좌부승지를 거쳤다.
    이듬해 병조참의 ·대사간 ·호조참의 ·예조참의를 지냈다. 경주 부윤으로 재직하면서 건립한 서악정사와 순천부사로 있으면서 건립한 옥천정사는 고향에 세운 구암정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지방문화와 교육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를 통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육영사업에 힘써 옛것을 알리고 의로움을 가르쳐 지방의 풍속을 교화하고공헌하였다.
    뒷 날 삼정사는 모두 서원으로 사액되어 선현의 제향과 교육 강론의 장소가 되었고 구암 자신은 후학들에 의하여 구계서원(구암정사)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암집’, 편저로는 ‘경현록’, ‘성리유편’, ‘열성어제’ , ‘논상례’, ‘한훤보록’이 있다.
  • 이충걸 (李忠傑 : 1465∼1526)
  • 율탄(栗灘) 이충걸은 1465년 3월 29일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에서 태어났다.

    1486년 성종 병오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량을 시작으로 1510년 중종조 경오년 대사원 전라감사를 지냈다. 1513년에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3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호를 따서 율탄정을 짓고 원근의 선비들과 시와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는 명관으로 『조선왕조실록』의 「성종실록」, 「연산일기」, 「중종실록」과 『국조방록』, 『연려실기술』, 『조선각도읍지』, 『신증동국여지승람』남해편 · 함안편, 『남해읍지』 등에 정적이 출중하고 명성이 높다고 기록되어 있다.
  • 임훈 (林薰 : 1500 ~1584)
  • 호는 갈천. 연산군 6년(1500년) 거창군 북상면 갈계에서 태어났다. 1540년(중종 35) 생원이 되고 1553년(명종 8) 사직서참봉 등을 지냈다.
    1566년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언양현감이 되고 군자감주부를 거쳐 장악원정 등을 역임했다.
    1582년(선조 15) 장례원판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했다.

    그는 짧은 관직의 재임기간을 제외하고는 고향에서 갈천서당을 열어 영남의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으며 노옥계, 조남명, 이퇴계와 친분있는 문장가로서 덕유산 기행문인 향적봉기, 일두 정여창 사당비 등의 명문을 남겼고, 학문은 중국 것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것을 주로 공부하였으며,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 전통, 문학등을 탐구하였다.
    또한 제자를 교육하는 방법은 쓰고 암송하는 것보다 대의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저서로 갈천집 4권 2책이 있다.
  • 정갑주 (1906~1963)
  • 남하(南荷) 정갑주는 1906년 6월 27일 사천시 이금동 362번지에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 법학과(1932년) 재학시절에는 학생대표로 시위를 주도하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일본 동경 중앙대학교 재학시절에는 재일본 동경조선기독교 청년회 이사로 있으면서 민족운동을 하던 중 동경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기도 했다.

    8·15광복 후 고향에서 "보흥의숙"이라는 학교법인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다가 195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당시 삼천포읍을 시로 승격시켰으며, 한때는 국립경찰학교 설립에 관계하다가 초대 부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삼천포에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나라에 기둥이 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국가를 위하는 길임을 일찍 깨닫고 사람의 최고 도덕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신조를 남기고 1963년 9월 3일 세상을 떠났다.
  • 정여창 (鄭汝昌 : 1450~1504)
  • 정여창은 조선 사림의 조종으로 꼽히는 김종직의 제자였으며, 연산군 시절 사화로 목숨을 잃었고, 광해군 시절 문묘에 배향되며 동방오현으로 추앙됐다.

    그는 행정을 보는 여가에 지방 수재들을 뽑아 서제를 지어 숙식시키면서 친히 과독을 열성껏 해서 그들의 육성에 성의를 다하니 학도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당시 향토의 개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서 ‘安義’는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가 된 모습이었다.

    정여창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된 무오사화(1498년)때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1504년 4월 함경도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 정인지 (鄭麟趾 : 1396∼1478)
  •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본관이 하동으로 태조 5년 1396년 태어났으며 시호는 문성공이다.

    태종 11년(1411년) 16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4년 식년문과에서 장원 급제하여 예빈주부, 사헌감찰, 예조좌랑을 지낸 뒤 세종 즉위(1418)년에 병조좌랑에 전임되었다.
    그 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고 집현전 응교에 이어 세종 7년(1425년) 집현전의 직제학에 올랐으며 1427년 문과중시-등용된 문신들에게 실시하는 과거제도-에 장원하여 높은 학식을 다시 평가 받고 이 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의 좌필선이 되고 이듬해에는 집현전의 부제학, 시강관(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직책)을 겸임하는 등 학문에 관계되는 직책에 있었으며,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권제, 안지 등과는 용비어천가 제작에 참여하였다.

    1442년 임금의 칙명과 교명을 기록 관리하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사륜요집’을 편찬하였으며 1443년 지중추원사로서 토지, 조세제도의 연구와 신법의 제정을 위한 전제상정소의 제조로서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제등을 새로 마련하는데 공헌하였다.
    1445년 1월 우참찬이 되고, 그해 《치평요람 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
    다음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에는 이조판서가 된 뒤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하였다.
    1449년 공조판서를 거쳐 1450년(문종 즉위년)좌참찬이 되고, 1451년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改撰)하였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1455년(세조 1년)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부사에 승진되고, 세자사(世子師)를 예겸(例兼)한 뒤 세조 즉위에 끼친 공로로 다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 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불경죄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 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478년 성종의 호학 및 당시의 문운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王師)으로 봉하여 문풍을 진작시키자는 논의와 함께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는 유학과 전고(典故)에 밝아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고, 세종∼문종대에는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역사·천문·역법·아악을 정리하였고, 한글 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 육성과 제도 정비에 기여하였다.
  • 조승숙 (趙承肅 : 1357∼1417)
  • 조승숙은 고려말 조선초 학자이며, 자는 경부(敬夫), 호는 덕곡(德谷)으로 함양에서 태어났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76년(우왕 2)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 특별히 저작랑(著作郎)에 제수되어 충하사(充賀使)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곳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 뒤 향리에 퇴거할 때에는 임금이 침향궤를 보내면서 “너의 성품이 강직하기가 마치 이 물건과 흡사하므로 글씨를 새겨 주노라.”고 하였다.

    1391년(공양왕 3)부여감무를 역임하다가 이듬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그 교수정은 중수를 거듭하여 오면서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색(李穡)·길재(吉再) 등과 도의로 친교를 맺고 성리학을 강론하였으며, 특히 길재와 함께 수창한 시는 유명하다.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사람이며, 성종은 그의 높은 절의를 추모하여 유호인(兪好仁)으로 하여금 제문을 지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함양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덕곡집》 1권 1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조식 (曺植 : 1501~1572)
  • 조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실천유학을 역설하였으며 지리산에 은거하여 성리학을 연구, 독특한 학문을 이룩하여 사림의 종사로 추앙받았다.
    연산군 7년(1501년) 삼가현(합천) 토골 외가에서 태어나 20세에 생원, 진사에 급제하였고 25세때 "성리대전"을 읽고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산해정을 짓고 공부에 전념하였고 48세때 고향으로 돌아와 계복당과 뇌룡정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처사로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를 보여줬다.
  • 주기용 (朱基瑢 : 1897~1966)
  • 주기용은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진해시에서 태어났다.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를 거쳐 동경고등사범학교 수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하고 마산에서 1년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뒤 오산중학교 교무주임, 배화여자중학교 교원을 역임하고, 1932년에 오산중학교 교장이 되었다가 1942년 일제에 의하여 사임당하였다.
    광복이 되자 다시 교장직을 맡았으며 조민당(朝民黨)의 간부직을 맡았다.

    이듬해에 월남하여 문교부 보통교육국장을 거쳐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 초대국회 문교사회분과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교육분야의 근간이 되는 〈교육법〉의 제정을 위하여 관계 인사들과 여러 차례의 심의를 거듭, 1949년 12월에 공포된 〈교육법〉의 모태를 마련하였다.

    중앙교육위원회 위원, 대한교육연합회 사무국장, 오산학교 이사 등을 역임한 뒤 1953년 오산중·고등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1961년에 정년퇴직하여 동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 주기효
  • 자는 우원, 호는 석천으로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1902년에 웅천군의 판임주사로 서임되었다.

    관리생활을 하면서 국내의 정세를 살펴보니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한국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구국의 길을 교육과 산업 진흥에 두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관직을 그만두고 상경하여 선각자들을 방문하였다.
    1906년 사재를 들여 웅천에 사립 개통학교(웅천초등학교 전신)를 창설하였고, 1907년 숙명의숙을 세웠다.
    졸업생중 유망한 제자 40여명을 선발하여 사재로 유학을 시켜 민족지사의 양성에 힘썼다.

    1914년 민족교육기관인 개통학교에 탄압이 가중되자 상무조합에 운영을 위임하고 실업진흥에 전념하였다.
    1917년 개통학교가 공립학교로 전환되면서 숙명의숙도 통합되었다.

    또한 실업조합, 홍업조합을 발기(發起)하고 '국채보상단연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 주세붕 (周世鵬 : 1495~1554)
  • 자는 경유, 호는 신재이면 본관은 상주이다. 1945년 합천군 율곡면에서 태어났다.

    주세붕은 우리나라 서원의 창시자이다. 중종 17년(1522) 문과에 급제한 후,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로 부임한다.

    풍기군수로 재직시 마을마다 오륜의 도(道)를 게시하고 소학과 삼강행실을 널리 가르치며 학생의 교육에 심혈을 쏟았다.
    부임한 이듬해 향교를 중수하여 교육에 힘쓰는 한편, 고려 말 성리학을 전래한 유학자 안향을 추모하여 죽계(竹溪) 상류의 백운동에 회헌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백운동서원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이는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은 것이며 우리 나라 서원의 효시로 유학과 숭문사상을 장려하고 지방의 풍교(風敎)를 바로 잡는 데 기여하였다.
    여기에는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를 향사하고 서책과 논밭을 비치하여 선현에 대한 봉사와 인재를 교육하여 육성하였다.

    청렴을 평생 신조로 경(敬)을 실천 덕목으로 삼았던 그는 사후 37년이 지난 선조 24년(1591년) 동림서원(桐林書院)에 처음 제향된 후 경북 영주 소수서원, 함안 덕연서원, 합천 도연서원, 황해 양근서원에 숭향되고 있다.
    숙종 2년(1676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최현배 (崔鉉培 : 1894 ~1970)
  • 최현배는 호가 외솔로 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국어 문법을 바로 세우고 한글 가로쓰기를 이루는등 한글의 과학화와 국어교육에 공헌하였으며, 일생을 한결같이 우리말, 글 사랑을 실천하고 계몽하여 민족 문화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어려서부터 명석하였고, 한일합방 후 주시경 선생이 가르치는 조선어(한글)강습원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우리 말글 연구에 대한 큰 포부를 품게 되었으며 우리말과 글로 교육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장래소망이라는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22살 되던해에 일본 유학길에 올라 철학을 공부하며 사회학을 연구하였으며 나라 외국어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철학, 논?락부 사건으로 검속되어 강제사직을 당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었으나 8.15 해방으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그는 광복 후 파란 많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라 사랑의 충성으로 꿋꿋이 살다가 돌아가신 겨레의 스승이다.
    외솔은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서도 배달겨레를 사랑하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특히 우리말 연구에 있어서 주시경에 이어 두드러진 업적을 쌓은 큰 학자이다.
  • 허발 (1875 ~1931)
  • 허발은 자는 달중이고, 호는 춘전이며 고종 11년(1874년) 경상남도 김해 활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옳은 일은 반드시 실천하지만, 옳지 못한 일에는 결코 굽히지 않는 용기를 지닌 성품이었다. 고종31년(1894)에 스무살의 젊은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임시정부에 수차에 걸쳐 4만여 원의 군자금을 전달하였으며 1920년 김해 유지 수명과 함께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자본금 50만원으로 김해은행을 설립하였고, 김해 교육회장, 수리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1922년 민족혼을 일깨우고 훌륭한 젊은이를 많이 길러내기 위하여 대지 3천여평과 백석 수대분을 기증하여 김해합성학교를 설립 초대 교장을 역임하면서 민족의 젊은이를 교육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는 열심히 일하며 모은 재산을 옳은 일과 훌륭한 젊은이를 길러내는데 썼으며 1967년 김해합성 초등학교에 공적비가 세워졌다.